[장군재명] 결핍 06
또다시 닷새가 지나도록 재명이 살던 자취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판자촌에서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 장군은 혜미에게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했고, 누구라도 재명의 이름을 꺼내기만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잔뜩 취했던 날 밤, 아무도 장군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몰라 학과 사무실에서 재울 수밖에 없었던 그 밤. 장군은 꿈에서도 재명의 이름을 불렀다.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 꼴을 보며 젬마가 치솟는 화를 꾸역꾸역 참았음을 장군은 모르고 있었다.
불 꺼진 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장군이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문 앞에 서자 기도에서 단내가 났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안에는 아무도 없다.
문을 연다고 해도, 이 안에는 아무도 없다.
뭐하러 그러냐고, 오면 뭘 할 거냐고, 다 지나간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냐고 수없이 자문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쑥대밭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꾹 꾹 비밀번호를 눌렀다. 천천히 열린 문은 장군의 직감을 배신하지 않은 대신 다른 무언가를 배신했다. 방은 비어 있었다.
배신당한 것. 이것이 무엇인지 장군은 모른다. 장군의 어린 시절은 그에게 많은 이름을 주지 않았다. 기억하는 사람은 적었고, 그들 중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은 죽은 자가 되었다. 옛날을 떠올리면 빈 소리만 허공을 울렸다. 꼭 제 부모의 죽음만이 과거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기다렸었나. 너를.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지, 뭘 해야 맞는 건지, 이 열기는 왜 사라지지 않는 건지, 자신을 쫓는 것도 아니었던 꿈속의 김재명을 왜 피하고 두려워했던 건지. 떠올리면 끝날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바뀌는 것이 있는지 장군은 몰랐다. 그 망령의 굴레를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재명이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살라는 뜻이었는데도, 그것을 다시 떠올린 것이 나쁜 일은 아닐 텐데도 여전히 목이 매여 있는 것만 같았다.
텅 비었다고 생각했던 시절 속에 김재명이 틀어박혀 있었다. 아니, 김재명이 숨어 있었으니 빈 것이 아니었나. 이젠 없으니 정말로 비었다. 그 허전함이 자신을 조여 오는 것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꽉 차 있었다고. 우습지도 않았다. 자조적으로 웃은 장군이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바람만 거침없이 불었다.
결핍 06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깜빡 잠이 들 뻔했던 장군이 초인종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재명이 돌아왔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천치도 아닌 재명이 자기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올 리가 없었다.
“김재명! 김재명, 너 왔어?”
젬마의 목소리였다.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재명이 온 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장군이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대감이 가득했던 눈이 그 빛을 잃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날이 선 젬마의 물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대답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던 장군을 멈춰 세운 것은 젬마의 말이었다.
“넌 정말 김재명이 지쳐서 나갔다고 생각해?”
“뭐?”
김재명의 부재에 다친 짐승처럼 독을 품고, 누구든 재명의 이름을 꺼내기만 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냈던 장군이었다. 꽉 쥔 주먹은 옥죄인 마음과도 같았다.
젬마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도, 타당한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일이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명이 혼자이기 때문에 함께 있어 줘야 하는 것도, 재명이 장군 외에는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걱정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재명이 웃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설령 재명이 잘 지내고 있어도, 옆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아무런 까닭 없이 그저 감정의 소용돌이에 좌지우지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작정 잡게 만든다. 술에 취해 꿈을 꾸면서 장군이 잡았던 것, 그것은 재명이었다. 장군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을 들으며 젬마가 알았던 것을 이제 장군도 알아야만 했다.
“그 판자촌에서 확인했던 건 뭐였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아니, 됐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넌 처음부터 김재명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
쿵, 쿵. 젬마의 심장이 뛰었다. 장군의 심장만이 죽은 듯이 멈추었다. 날이 덜 화창하여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바람이 덜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젬마는 시간이 멈추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인적 없는 골목은 조용했고, 장군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 잠깐의 시간이 젬마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꼭 처음 말문을 트는 아이처럼, 장군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남자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간신히 내뱉은 말처럼 들려 젬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무표정이었던 장군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잠깐 사귄 친구가 떠난다고 해도 섭섭한 게 사람 마음이야. 오래된 친구가 갑자기 떠나버린 상황에 화를 안 낼 리는 없지만, 내가 본 네 모습은 그 이상이었어.”
“…네가 뭘 안다고.”
“너 자는 중에도 김재명 불렀잖아. 재명이 말만 나오면,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얼굴이 굳어졌지. 그게 이혜미든 나든 상관없이 다 싫었을 거야.”
형편없이 인상을 찡그린 장군은 분해 보였다. 또 슬퍼 보였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한번 닫으려 하는 문을 붙잡고, 젬마가 말을 이었다.
“화가 나니까.”
“야.”
“곁에 없다는 게 그냥 화가 나니까. 뭐가 됐든 앞이 안 보이니까.”
“…….”
“하지만 앞에 있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나니까.”
“…그만해라.”
“네가 그날 그 다 무너진 집에 가서 뭘 확인했는지 난 몰라.”
아마 답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야. 젬마는 담담하게 장군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뛰던 심장박동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재명이도 너를…….”
“…….”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봐, 박장군.”
장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젬마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지금까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이번에도 장군이 회피하고 도망친다면 젬마로서도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걸었는지도,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정처 없이 걷던 장군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어린 아이와 부딪힌 까닭이었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주고 나서야 자신이 걷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장군이 앞을 바라보았다.
젬마가 했던 말들이 뒤섞여 주위를 돌고 있었다. 중심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대체 뭐라고 한 거야. 화가 나니까. 무슨 소리야. 곁에 없다는 게 그냥 화가 나니까. 뭐야. 뭐라고 한 거야. 뭐가 됐든 앞이 안 보이니까. 무슨 말이야. 하지만 앞에 있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나니까. 뭘 안다고. 네가 뭘 안다고. 재명이 말만 나오면,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얼굴이 굳어졌지. 그게 이혜미든 나든 상관없이 다 싫었을 거야. 그건. 너 자는 중에도 김재명 불렀잖아. 그건…….
- 넌 처음부터 김재명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
장군은 그제서야 참은 줄도 몰랐던 숨을 토해냈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재명의 집 앞에서 있었던 일이 휘몰아쳤다.
- 넌 처음부터 김재명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
누가, 누구를.
- 그리고 아마, 재명이도 너를…….
좋아한다고?
- 그 판자촌에서 확인했던 건 뭐였어?
누가?
장군아. 순간 장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장군이 번쩍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제 키보다 작은 사람들이 고만고만하게 복작대는 곳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 장군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목소리. 거듭 들려오는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재명의 것이었다. 어디야, 어디. 장군아. 그 목소리가 또 들렸을 때, 장군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앞뒤 잴 것도 없었다. 장군은 붐비는 거리를 가르고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익숙한 뒷모습이 어찌나 잘 달리는지,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가 않았다. 씨발. 씨발. 장군은 사정없이 욕을 하며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많은 생각을 하며 분주히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장군은 멈추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멀고, 부르려니 입이 닫혀 열리지 않는데도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익숙한 뒷모습이 드디어 서점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장군에 직원이 깜짝 놀라 일어서야 엄마야 소리를 냈다. 들어온 손님의 눈이 풀려 있어 술이라도 마신 건가 싶었으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은 구겨질대로 구겨져 있었다.
“저기요.”
“네, 네?”
기분이 몹시 나빠 보이니 비위 맞춰 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 험상궂은 손님이 진상 짓이라도 했다가는, 그 뒷감당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직원을 부른 주제에 그쪽으로는 시선 한 번 안 준 장군이 여전히 책장 사이를 살피며 물었다.
“방금 들어왔던 놈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네?”
“방금 들어왔던 놈, 어디로 갔냐고.”
“방금 들어왔다고 하시면… 손님뿐이신데요…….”
“그러니까 그 손님 어디로 갔냐고!”
“아니, 제 말은 그 방금 들어오신 분이 손님이라는…….”
직원이 자신을 향해 손짓하자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장군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냈다. 나 말고 직전에 다른 놈 들어오지 않았냐고 묻는 장군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포기가 안 되는지 계속해서 서점 안을 둘러보는 장군을 안절부절 따라다닌 직원이 몇 번이나 책장 사이를 확인한 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서 있는 장군을 보고 저, 손님 하고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장군이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제야 장군은 그 목소리가 제 귀에만 들리던 환청이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오라는 듯 앞서 달리던 뒷모습은 눈의 착각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장군이 주먹을 꽉 쥐었다.
터덜터덜 걸어 제 집으로 돌아온 장군은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곧게 쳐다보던 젬마의 얼굴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김재명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젬마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다. 장군은 두 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머리가 이렇게 무거운 것은 처음이었다. 당장에 잘라 버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젬마의 말은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알아먹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애초에 장군에게 좋아한다는 것은 그랬다. 혜미를 보고 딱히 사랑을 깨달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혜미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 그 작은 여자애가 자꾸만 제 눈앞에 알짱거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 마음이 사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지 장군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들이닥친 젬마의 말만은 알았다.
- 재명이 말만 나오면,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얼굴이 굳어졌지.
재명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람이 그게 혜미든 젬마든, 다른 동기들이든 알 바 아니었다. 다 싫었다. 하다못해 나무와 바람에게까지 화가 났다.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재명이 살던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앞이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뭔가 안쪽의 하나가 잘려나간 것처럼 정신줄을 놓았다가 퍼뜩 차려 보면 스스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끓어올라 속이 타도록 뜨거웠다.
- 그 판자촌에서 확인했던 건 뭐였어?
배신당했다고 느꼈던 것,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없다는 사실만 뚜렷할 뿐이지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건지, 새빨간 불덩이가 왜 없어지지 않는 건지, 왜 재명을 피했던 건지, 왜 무서웠던 건지 몰랐다. 이상하지 않냐고. 가 버린 게 이상하지 않냐고. 아니. 나 때문인 걸 알아서, 나 때문이라고 확신하니까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게 아니면 가 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내 병신 짓 보다 못한 것 말고는 갈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앞에 있어도 잡을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난다는 그 말이 다 맞았다.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이 죽을 것 같은 게, 이 질식할 것 같은 게,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뭐길래 날 죄여오는 거냐고 몇 번이나 물었던 게 좋아하는 거였다고? 그때 가 버리지, 왜. 그때 버리고 사라지면 됐을 것을 왜 남아 있었냐고, 그때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 놨냐고 원망했던 것이. 그러다가도 아니다, 내 탓이다 했던 그게.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좋아하는 게 이런 거라고?
어려운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다 와 닿지 않는다. 마냥 보살펴 주고 싶은 것도, 하는 일 다 잘 되었으면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를 보살펴 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지켜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지킨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해 준 것도 아무것도 없다. 좋다고?
“아니, 아니… 오히려 이건…….”
구해 줘. 꺼내 줘. 살려 줘.
“이건…….”
살고 싶다. 구원해 줘.
“이건 그보다 더…….”
내 빛. 내 물.
어지러운 머리를 관통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