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재명] 결핍 07 結
불 꺼진 어두운 방,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판자촌에서의 기억은 단지 과거가 아니었다. 살아야 한다고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고 단지 과거가 아니었다.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군은 모래 위의 성보다도 더 허술하고 위태롭게 서 있었던 것이다. 기억이 났기 때문에 장군은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것이 형체 없는 창살임을 알았다. 저가 제 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은, 전부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달라지는 건 있었다. 그 과거의 어두움 속에 재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달라지는 것은 반드시 있었다. 여전히 세상이 더럽고 추악해도,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 해도, 달라지는 것은 있었다. 아직 채 한 달도 안 되었다. 너 같은 거 평생 안 보겠다고 하고 사라진 것도 아닌데, 살아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보면 될 텐데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미쳐 날뛰었던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달라지는 건 있다. 있다. 분명히 있다. 그래선 안 돼, 네가 잡아 줬으니 그렇게 가 버려서는 안 돼. 개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장군은 매달리고 싶었다. 뭐냐고 물었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몇 번을 물어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답은.
- 아마 답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답은, 전부.
그건 전부. 달라지는 건 전부. 왜냐하면 그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어떻게 살든, 그날이 나를 살게 했으니까.
왜냐하면, 내가 후회하니까. 도망친 것, 네가 불편해서 멀어지려고 했던 것, 후회하니까. 네가 돌아올까, 미안하다고 하면 될까, 그럼 너는 뭐라고 할까 머리통이 깨지게 고민했던 나는 후회하는 거였으니까. 내가 기억했다면 그러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그래서 무서웠던가. 네가 나를 쥐고 있어서.
실은 한 번도 너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만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 살아, 장군아.
문득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들렸던 목소리는 늘 살라고 했다. 네가 살라고 해서 살았으니, 살라 하는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게 당연하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불편한 것도, 편한 것도 그냥…
“…살고 싶어.”
그냥, 다 너 때문이어서. 네가 살라고 해서 살아서. 사는 게 다 너여서. 네가 전부여서. 언제부터….
- 장군아.
“언제부터 나는…….”
살게 해 줬던 것은 어린 시절의 일만도 아니고, 이미 지나가버린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 물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름 붙일 수 없을 갈증이었다. 다른 무엇으로도 명명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다른 어디로도 보낼 수 없다. 장군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네가 필요해서, 네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나는, 나는 네가. 네가, 재명아…….
장군은 벽에 이마를 댔다.
- 그리고 아마, 재명이도 너를…….
어디에라도 닿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결핍 07
전화를 걸어 봐도 받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장군은 메시지를 남겼다. 들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듣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장군에게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나는 네가 무서웠다. 그 안 보이는 속도, 한결 같은 눈동자도, 다 무서웠어. 어릴 때보다 한 점도 더 탁해지지 않은 눈을 마주할 때마다 자격지심이 올라왔고, 말로 설명 못 할 감정이 온몸을 먹어치웠어.”
네 앞에 서면 나는 꼭 흙탕물에 젖은 아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몸에 묻은 오물을 씻으려고 벗고, 벗고, 또 벗어도 사라지지 않아서. 살갗까지 깎아내기엔 용기가 없어서 남몰래 울분을 토하는 아이 같았다.
“같은 시간이 흘렀는데 난 다 변한 아이로 남아 있었고, 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어른이 된 것 같았어.”
무서웠다, 네가. 네 속, 네 웃음, 네 눈. 모든 게 다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도 네가 무서운 건 그대로야. 네가 날 탓하던 게 아니라고 해도, 네가 날 다 받아 주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난 지금이라도, 그날 날 살려 줬던 게 너였다고 해도, 무서운 건 그대로야. 넌 거울이고, 날 비추고, 날 보게 했어. 그러니까 널 피했던 건, 날 피했던 거나 다름없었던 거야. 무서운 건 나 스스로이기로 해. 나는 날 극복해야 돼. 실패하면 난 영원히 네가 무서울 거니까. 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이게 뭔지 알았어. 다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숨 막히게 하는 이게 뭔지. 누군가는 이걸 좋아한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이걸 사랑이라고도 하지만, 뭐든, 네가 없으면 나는 안 돼.”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네가 세상에 없으면, 네가 내게 없으면, 나는 안 돼.
“넌 위안이고, 나를 달래고, 나를 살게 해. …모순이지. 무섭다면서 위안을 얻는다니. 가끔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어. 아무 이유 없이 칼부림을 하고 싶기도 했고, 쉽게 죽어 버리는 상상도 했어. 가끔은 정말로 죽고 싶었어. 다 버리고.”
다 버리고, 다 던지고, 다 벗고 그냥 가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아무것도 없고, 고통도, 기쁨도, 기억도, 나조차도 없는 곳으로.
“그럴 때 항상 살라고, 네가 해 준 말인지도 몰랐던 그 말이 머리통을 울려서 아, 살아야지. 이 순간은 살아야지…….”
무엇이 삶인가. 고통도, 기쁨도, 기억도 없으면 뭐가 삶인가. 그건 죽음도 아니다. 그건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도망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만 달아나라고 한 것이겠지. 보라고, 널 보라고. 이 삶을 보고, 죽음도 보라고. 그렇게…
살라고.
살아야 죽기도 하고, 있어야 없기도 하다고. 보기까지 이만큼 걸렸다. 내게 아픈 기억, 비겁하게 잊어버렸던 것을 찾는 데 이만큼, 피했던 네 속의 나를 보는 데 이만큼, 그 속의 너를 보는 데 이만큼. 네가 보게 했다. 나는 두 눈을 멀쩡히 가진 채 태어나 놓고 무엇도 내 스스로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어.
“사랑해…….”
너는 계속 나를 보고 있었을까.
나를 기다렸을까.
장군은 천천히 짐을 옮겼다. 술을 마시고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어떤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집에서, 재명의 집으로. 언제라도 재명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 재명을 반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혼자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매일 레시피를 보고 엉터리 요리를 만들어댔고,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에 매일 상을 차렸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고, 결국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처음 재명이 사라진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났다. 무시로 일관하던 젬마마저 슬슬 장군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만 두라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장군은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상관없었다.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명이 선택할 몫이었다.
나는 계속 너를 보고 있을게.
너를 기다릴게.
날이 화창한 오후였다. 수업을 듣고 돌아가던 장군이 계단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천천히 걸어간 장군이 활짝 열린 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운동화.
“왔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눌렀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둘 수가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뭘 잘했다고.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코가 시큰거렸다.
“…다녀왔어.”
그제야 고개를 든 장군이 변함없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김재명. 보기 드물게 눈물이 맺힌 눈이었다. 또다시 환상일까 싶어 팔을 뻗어 재명의 손의 붙잡았다. 사라지지 않는다. 환상처럼,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제야 왈칵 마음이 놓였다. 따스하게 마주잡아오는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잘 왔어.”
숨이 쉬어지고, 심장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