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今上)위에 좌상(左相). 박충현이 좌의정에 오른 이래 금상 위에 올라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있음을,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젊어 한 때 창기(娼妓)를 씨앗으로 들여 추문이 따랐으나 그의 기세는 꺾인 적이 없었다. 무너져가는 가문을 일으킨 것으로도 모자라 박 씨 가문을 조선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로 만들어 놓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금상의 무한한 신뢰, 관군을 압도하는 사병, 뒤를 받쳐 줄 든든한 장자, 백성들의 지지.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박 씨 가문의 아들들이 가장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좌상 박충현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그 중 장자의 이름은 현군이었다. 어질 현에 군자를 의미하는 군으로, 제 이름에 딱 맞는 이였다. 백성들은 벌써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고, 내로라하는 양반집 규수들은 그 집 장자에게 시집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현군의 천성이 퍽 다정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허나 그 둘째 아들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박 씨 가문의 돈 나가는 구멍. 희대의 탕아라 이름 붙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차남인 장군이었다. 민가에서는 장군을 들어 ‘박 씨 일가의 부흥은 모두 그 둘째 아들내미를 데리고 사는 데 대한 천지신명님의 보상이다’라고까지 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장가는커녕 매일같이 기생들 치마폭에 싸여 정착할 줄을 모르니, 민간에서는 장군이 지나가면 끌끌 혀를 차기 일쑤였다. 우스운 것은, 그러면서도 형 현군에 비해 풍채가 좋고 아비를 꼭 빼닮아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을 다들 한 번씩 힐끔 돌아본다는 것이었다.
그 두 형제가 처음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만 해도 학문에서는 첫째인 현군이 조금 앞섰으나, 무예에서는 장군이 앞섰다. 허나 현군이 열일곱의 나이에 소과 장원급제한 이후, 장군은 그 잘하던 학문과 무예를 모두 놓고 살기 시작했다. 항간에서는 그 이유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우세한 것은 현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생각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는 것이었다.
사실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남 얘기 떠들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박 씨 가문 형제는 뭐가 됐든 좋은 반찬거리였다.
혼인은커녕 단 한 번도 소과에 응시조차 하지 않은 장군이 지루한 얼굴로 열일곱 성인식을 치르던 그날 밤,
느닷없이 열린 모란각 문틈 사이로 제 몸만 한 거문고를 끌어안은 사내가 뛰어 들어갔다.
'장군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준영재명장군] 호흡 04 (0) | 2017.05.11 |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3 (0) | 2017.05.08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2 (0) | 2017.05.08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1 (0) | 2017.05.07 |
| [성훈재명] 사형수의 일기 (0) | 2017.03.20 |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깊게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편히 깨어 있을 수도 없었다. 선잠에라도 들면 열이 끓었고, 눈을 뜨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간절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김재명. 봐야지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면 이 병이 나을 것 같았다. 화상을 입힐 것처럼 눈물이 뜨거웠다.
“준영이가 이렇게 아픈데 김재명인지 뭔지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둘이 친구라며! 전화는 왜 안 받는 건데!”
“그 양반이 억수로 바쁜 형사라 안 합니까.”
“지가 바쁘면 뭐 얼마나 바빠! 대한민국에 신준영보다 바쁜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확인사살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화는 왜 안 받는 건지, 왜 연락 한 자락도 닿지 않는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싫어졌으니까. 이제 지겨워졌으니까. 알면서도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고,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잠시 싸우고 있는 것뿐이라고.
처음 박장군과 키스하는 김재명을 봤을 때, 예전에 본 적 있다고 느낀 얼굴은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우리. 신준영과 김재명. 서로가 설렘에 잠 못 들던 시절의 모습.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거라고, 이제와서, 한참만에 그렇게 생각했다.
호흡 04
아무리 아파도 일은 해야 했다. 준영의 고집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재명을 떠올리며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계획에도 없던 우정출연이었고, 친하지도 않은 배우의 영화였다. 준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우정은 무슨.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언제라도 쓰러질지 모를 준영의 상태를 아는 매니저만 발을 구를 뿐이었다.
싸이코패스 연기를 하던 도중 상대 배우의 얼굴에 박장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쩌면 자신을 본 것인지도 몰랐다. 누가 됐든 싫었다. 박장군도, 신준영도. 대본에도 없는, 아무도 모를 박장군의 이름을 부르며 주먹질을 했다. 고소를 당하든 똑같이 맞든, 후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 얼굴이 싫었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힐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야, 너 왜 때려!”
“박장군… 박장군…!”
“이거 준영이가 때리는 씬 아니잖아, 스탑! 누가 준영이 좀 말려! 컷!!”
주먹질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지러웠다. 눈앞이 핑 돌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하늘이 보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누군가 제 이름을 크게 부른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싫었다. 준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됐다.
“이제… 됐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파란 하늘이 아닌 호텔 룸의 천장이었다. 조용히 숨을 내쉬던 준영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맞은 놈은 난데 왜 때린 놈이 쓰러져. 어디 아프냐? 이해 못 할 상황에 준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배우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냐? 내가 고소라도 하면 어쩌려고?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서윤후가 빈정거리며 다가와 곁에 앉았다.
“고소해, 그냥. 사람을 쳤으면 벌을 받아야지.”
“오, 세게 나오는데.”
“…….”
“너도 아는 것 같더라, 박장군?”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돌리자 윤후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박장군. 장군의 전화번호였다.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준영의 손을 피한 윤후가 비웃기라도 하듯 웃었다. 다급해진 준영이 윤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호 내놔.”
“와, 네가 박장군이랑 얽혔을 줄이야. 장군이 잘 지내냐?”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장군이한테 도움 좀 받았거든.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박장군한테 당하냐?”
“무슨, 그게 무슨…….”
“첫사랑은 찾았다고 하든? 듣기로는 그 새끼 첫사랑 찾으려고 그 일 한다던데.”
“무슨 말이냐고, 그게!”
윤후에게 들은 이야기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믿기 힘들고,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탈 없이 헤어지게 해 준다고, 박장군이. 깨끗하게, 안전하게… 헤어지게 해 준다고.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돈 받고 애인 대행이나 하는 놈이라는 거잖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화가 났다. 그렇게 헤어지고 싶었던 걸까. 재명의 얼굴이 떠오르고, 헤어지자고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헤어질 구실이 필요했던 거였을까.
“그렇게까지…….”
“뭐?”
그렇게까지 해서 헤어지고 싶었던 걸까. 나랑 헤어지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하고 싶었던 걸까. 비참해졌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준영이 다시 윤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박장군 번호.”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너 행동 똑바로 하고 다녀, 신준영. 어쩌다가 장군이까지, 쯧.”
장군의 번호를 핸드폰에 옮겨 적은 준영이 윤후에게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웃음 가득 담긴 얼굴로 준영을 바라보던 윤후가 가는 뒷모습에 말을 건넸다.
“장군이 만나면 안부 전해라. 첫사랑 빨리 찾길 원한다고도 전하고.”
이제 됐다고? 그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이었다. 보내 주겠다는, 보내 줄 테니 그 사람과 행복하라는 위선. 돼긴 뭐가 돼, 씨발. 끝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준영을 만나기 전까지 연애는커녕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재명은 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어려웠고, 연애가 어려웠다. 쉬운 적이 없었다. 이제 좀 할 만하다 싶었을 무렵에는 이미 준영의 마음이 흐려진 이후였다. 잘한 것 하나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표현해 준 적이 많지 않으니 그럴 만하다 인정하라고 한다면, 힘들겠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박장군. 짐 가지러 가야 해.”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박장군이었다. 자존심을 구기고 제 연애를 털어놓았던 그날, 장군은 자신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잘 만났다고, 자신을 고용하라고. 아무리 잘난 김재명이라도 연애에는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으니 장군의 속내를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뻔한 일이었다. 그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군과 함께하기로 한 이후, 장군이 내건 규칙은 딱 세 가지였다.
신준영을 만날 땐 늘 자신과 함께일 것.
됐다고 할 때까지 신준영에게 진심을 표현하지 말 것.
입금은 일이 성공한 후에 할 것.
“카레 먹고 싶은데 김재명 씨는 어때요. 콜?”
“…마음대로 해.”
그 조건들에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장군과 해 온 일들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품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장군의 사과에는 무언가 있었다. 귀에 박힌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라고. 뭐가? 왜? 지금까지 장군이 계획한 대로 아무 문제 없이 해 왔다. 그렇다면 장군이 미안할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신준영?”
익숙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재명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시선을 느끼고 있을 텐데 장군은 재명을 보지도, 차를 세우지도 않았다. 신준영 씨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 아, 나 개인정보에 굉장히 민감한데. 너스레를 떠는 말과는 달리 장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와 닮은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재명이 입을 열었다.
“박장군. 차 세워.”
“안 그래도 지금 가는 중이니까 만나서 얘기합시다. 내가 지금 운전 중이라. 왜 가긴요, 짐 가지러 가죠.”
“잠깐 세우라니까.”
“목소리 들리시죠? 당연히 옆에 있고, 같이 가고 있으니까 일단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장군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명이 장군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 좀 세워. 재명의 말에도 장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장군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신준영이 사실을 알았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명과 자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불안했다.
“내가 전에 첫사랑 얘기 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런 얘기가 아닌데.”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일 끝나고 해 줄 테니까 일단은 기다려요.”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신준영의 전화 한 통에 이렇게나 흔들리는 김재명이라면, 아닌 척해도 온종일 핸드폰을 힐끔거리고,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 당신이라면 이제 내 감정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정말로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 사과도 했고, 곁에 있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명은 장군의 말보다 신준영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더 답답해 보였으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은 나의 첫 숨이라고. 당신을 사랑했다고. 눈을 마주보고, 두 손을 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허락한다면 그때까지만 시간을 붙잡아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김재명 씨.”
“…….”
“아니, 그냥. 일 끝나면 기름값까지 다 받아낼 테니까 잠수 탈 생각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변명을 하겠지.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참이나 전의 얘기일 뿐이라고. 주는 돈 다 받고, 변명거리를 만들 거야. 우리는 그냥 비즈니스 관계였다고. 나도, 사랑 아니었다고.
'장군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군재명 고전물 1 (2) | 2017.06.10 |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3 (0) | 2017.05.08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2 (0) | 2017.05.08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1 (0) | 2017.05.07 |
| [성훈재명] 사형수의 일기 (0) | 2017.03.20 |
처음 만난 것은 삼 년 전 겨울, 게이바 앞이었다. 남자는 무슨, 그 무렵의 장군은 어리고 예쁜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것을 삶의 이유라 여기고 살았다. 돈, 외모, 스펙, 여자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인생이었다. 평범한 바인 줄 알고 들어갔던 곳에서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자신을 보며 윙크했을 때, 장군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밖으로 나와 침을 뱉었다. 어우, 씨발. 같은 거 달린 새끼들끼리 그 짓이 하고 싶나. 호모들 모이는 곳이라고 표시를 해 놨어야, 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붙잡았다. 아까 그 새끼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았을 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 누구…….
- 아, 아니구나. 다른 사람이랑 헷갈렸네요.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얼굴이 벌겋고 술 냄새가 나는 게, 딱 봐도 거하게 마셨구나 싶었다. 장군은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멍하니 그 얼굴만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술에 취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멀리서 목도리를 칭칭 둘러맨 남자가 다가왔다.
- 김재명!
아, 이름이 김재명이구나. 혼자 생각할 때 즘 술에 취한 남자는, 그러니까 김재명은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미처 붙잡을 틈도 없었다. 데리러 온 걸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장군은 문득, 데리러 온 그 남자가 입은 코트가 자신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쾌해졌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트를 벗은 장군이 다시 바 안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두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나타난 걸까. 주변에 술집이 많은데, 여기서 기다리면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
“사진. 왜. 돌려줘?”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력은 나쁜 것 같은데.”
“까분다.”
당신은 기억도 못 하지만, 삼 년을 기다렸다. 당신을 기다리며 별 짓을 다 했다. 삼 년 내내 하는 일도 없이 게이바에 죽치고 앉아 당신을 기다리다 보니 돈이 떨어졌고, 당신에게 다가갈 구실도 없었다. 다시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엮일 만한 핑계가 필요했다. 고학력에 고스펙이어도 결국 지금 하는 일은 좋게 말하면 게이바의 연애 컨설턴트, 나쁘게 말하면 애인대행.
아무래도 이 바닥은, 그러니까 게이들은 소수인데다 아직까지는 남들에게 편히 드러내고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서 온갖 추한 꼴을 다 보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별 후 복수심에 아웃팅을 시키는 일도 허다했다. 그럴 때 새로운 애인인 척 안전한 이별을 돕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외모든 학력이든 장군이 든든한 새 애인 역할에 딱인 것은 누가 봐도 어울렸으니까.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교수님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천재 박장군은 사라졌다. 고작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리 거창할 것 없는 첫사랑이었다.
호흡 03
장군에게 남자는 어려웠다. 배꼽 아래 문란하게 돌던 박장군의 상대는 늘 여자였지, 남자와 놀아 본 적은 없었다. 사실 남자와 섹스해 본 적도 없었다. 김재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여자와 항문섹스는 해 봤지만, 남자와 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장군은 아직도 남자가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재명이 어려웠다. 마냥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여자 대하듯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물은 무엇을 줘야 좋아하는지, 데이트는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지는 커녕 기분이 안 좋을 때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장군은 지금, 말 한마디 없이 짐을 풀고 있는 재명의 등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김재명 씨.”
“…….”
“그… 드라이브 갈까?”
“아니.”
“어, 그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장군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제발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박장군 멍청한 새끼야. 해 다 졌는데 드라이브는 무슨 드라이브야. 장군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달달한 것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집을 나서려 할 때 재명이 차 키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어디 가게?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어디 가냐니까?”
“드라이브.”
“아니, 방금 싫다더니…….”
“혼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나가 버리는 건조한 재명을 얼 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장군이 뒤를 따랐다. 늦지 않게 따라붙어 차 키를 빼앗아 든 장군이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재명이 그 자리에 서서 장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타라는 말에도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 거 되게 까다롭네. 차에서 내린 장군이 재명에게 다가갔다.
“지금 김재명 씨 운전할 멘탈 아는 걸로 아는데.”
“…….”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아니면 그냥 갑시다, 좀. 없는 사람처럼 입 다물고 운전만 할 테니까. 오케이?”
어떻게 한 번도 안 잡을 수가 있지.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재명이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어째 점점 일이 꼬여가는 것 같았다. 게이바에서 만난 장군을 고용했다. 술김에, 욱하는 마음에, 또한 진심으로. 원했던 결과가 있었으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데요?
- 다시…….
“김재명 씨, 자?”
드라이브는 혼자 하고 싶었다. 자꾸만 장군을 원망하게 되어 신경이 쓰였다. 너 전문가라며.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거 아니라며. 네 말만 들으면 다 된다며. 다 너 때문이야. 제 잘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장군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기게 되어서,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남탓을 하는 건 질색이었다. 차라리 자고 싶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장군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을 감은 재명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마른 입술을 쓸어 주고 싶었다. 모두 제 욕심이었다. 장군은 손을 뻗어 재명의 마른 손을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자고 있으니까. 모를 테니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아니 그보다도 먼저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해.”
잠들지 못한 재명은 그저 뜻 모를 장군의 사과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해. 다시 한번 장군의 사과가 이어졌다. 당신을 욕심내고,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렇게 힘들어 할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좋지만은 않다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실은 마냥 좋았다. 김재명과 함께 있다는 게 좋았고,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게 좋았다. 행복에 눈이 멀어 자신이 한 거짓말과 갖은 모략의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다. 재명이 상처받을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갖고 싶었다고 하면 나를 이해해 줄까.
죽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당신을 훔치고 싶었다고, 무릎을 꿇고 빌면 나를 용서해 줄까.
“……미안해.”
그럼에도 이 거짓말을 끝낼 생각이 들지 않아서, 끝내고 싶지 않아서 미안하다. 후에 모든 것을 알게 될 당신이 나를 욕하고 저주한다고 해도, 당장 당신 눈앞을 가리고 내 옆에 묶어 두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황홀해서. 정신을 잃어도 좋을만큼 달콤해서. 그래서 그리 거창할 것 없었던 첫사랑이, 이제는 첫 숨이라도 된 듯이 간절했다.
전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대화로 해결하자고, 이러지 말라고. 일단은 붙잡고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재명은 떠났고, 다른 사람의 옆에 있다. 가지 말라는 말도 해 보지 못했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돌아오라는 말도.
서재에는 재명이 아직 가져가지 못한 책들이 남아 있었다. 재명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고는 서재가 전부였다. 다시 가지러 올까. 다시 오면 뭐라고 할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책상에 놓인 액자에는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잘 웃지도 않는 무뚝뚝한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 보던 준영은 눈물을 삼켰다. 작은 추억 하나가 이다지도 소중하게 느껴지게 될 거라고, 그런 날이 오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땐 네가 내 연인이라서 참 좋았는데…….”
곁에 없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장군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군재명 고전물 1 (2) | 2017.06.10 |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4 (0) | 2017.05.11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2 (0) | 2017.05.08 |
| [준영재명장군] 호흡 01 (0) | 2017.05.07 |
| [성훈재명] 사형수의 일기 (0) | 2017.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