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깊게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편히 깨어 있을 수도 없었다. 선잠에라도 들면 열이 끓었고, 눈을 뜨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간절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김재명. 봐야지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면 이 병이 나을 것 같았다. 화상을 입힐 것처럼 눈물이 뜨거웠다.
“준영이가 이렇게 아픈데 김재명인지 뭔지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둘이 친구라며! 전화는 왜 안 받는 건데!”
“그 양반이 억수로 바쁜 형사라 안 합니까.”
“지가 바쁘면 뭐 얼마나 바빠! 대한민국에 신준영보다 바쁜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확인사살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화는 왜 안 받는 건지, 왜 연락 한 자락도 닿지 않는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싫어졌으니까. 이제 지겨워졌으니까. 알면서도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고,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잠시 싸우고 있는 것뿐이라고.
처음 박장군과 키스하는 김재명을 봤을 때, 예전에 본 적 있다고 느낀 얼굴은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우리. 신준영과 김재명. 서로가 설렘에 잠 못 들던 시절의 모습.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거라고, 이제와서, 한참만에 그렇게 생각했다.
호흡 04
아무리 아파도 일은 해야 했다. 준영의 고집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재명을 떠올리며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계획에도 없던 우정출연이었고, 친하지도 않은 배우의 영화였다. 준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우정은 무슨.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언제라도 쓰러질지 모를 준영의 상태를 아는 매니저만 발을 구를 뿐이었다.
싸이코패스 연기를 하던 도중 상대 배우의 얼굴에 박장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쩌면 자신을 본 것인지도 몰랐다. 누가 됐든 싫었다. 박장군도, 신준영도. 대본에도 없는, 아무도 모를 박장군의 이름을 부르며 주먹질을 했다. 고소를 당하든 똑같이 맞든, 후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 얼굴이 싫었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힐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야, 너 왜 때려!”
“박장군… 박장군…!”
“이거 준영이가 때리는 씬 아니잖아, 스탑! 누가 준영이 좀 말려! 컷!!”
주먹질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지러웠다. 눈앞이 핑 돌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하늘이 보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누군가 제 이름을 크게 부른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싫었다. 준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됐다.
“이제… 됐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파란 하늘이 아닌 호텔 룸의 천장이었다. 조용히 숨을 내쉬던 준영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맞은 놈은 난데 왜 때린 놈이 쓰러져. 어디 아프냐? 이해 못 할 상황에 준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배우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냐? 내가 고소라도 하면 어쩌려고?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서윤후가 빈정거리며 다가와 곁에 앉았다.
“고소해, 그냥. 사람을 쳤으면 벌을 받아야지.”
“오, 세게 나오는데.”
“…….”
“너도 아는 것 같더라, 박장군?”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돌리자 윤후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박장군. 장군의 전화번호였다.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준영의 손을 피한 윤후가 비웃기라도 하듯 웃었다. 다급해진 준영이 윤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호 내놔.”
“와, 네가 박장군이랑 얽혔을 줄이야. 장군이 잘 지내냐?”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장군이한테 도움 좀 받았거든.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박장군한테 당하냐?”
“무슨, 그게 무슨…….”
“첫사랑은 찾았다고 하든? 듣기로는 그 새끼 첫사랑 찾으려고 그 일 한다던데.”
“무슨 말이냐고, 그게!”
윤후에게 들은 이야기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믿기 힘들고,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탈 없이 헤어지게 해 준다고, 박장군이. 깨끗하게, 안전하게… 헤어지게 해 준다고.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돈 받고 애인 대행이나 하는 놈이라는 거잖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화가 났다. 그렇게 헤어지고 싶었던 걸까. 재명의 얼굴이 떠오르고, 헤어지자고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헤어질 구실이 필요했던 거였을까.
“그렇게까지…….”
“뭐?”
그렇게까지 해서 헤어지고 싶었던 걸까. 나랑 헤어지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하고 싶었던 걸까. 비참해졌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준영이 다시 윤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박장군 번호.”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너 행동 똑바로 하고 다녀, 신준영. 어쩌다가 장군이까지, 쯧.”
장군의 번호를 핸드폰에 옮겨 적은 준영이 윤후에게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웃음 가득 담긴 얼굴로 준영을 바라보던 윤후가 가는 뒷모습에 말을 건넸다.
“장군이 만나면 안부 전해라. 첫사랑 빨리 찾길 원한다고도 전하고.”
이제 됐다고? 그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이었다. 보내 주겠다는, 보내 줄 테니 그 사람과 행복하라는 위선. 돼긴 뭐가 돼, 씨발. 끝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준영을 만나기 전까지 연애는커녕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재명은 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어려웠고, 연애가 어려웠다. 쉬운 적이 없었다. 이제 좀 할 만하다 싶었을 무렵에는 이미 준영의 마음이 흐려진 이후였다. 잘한 것 하나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표현해 준 적이 많지 않으니 그럴 만하다 인정하라고 한다면, 힘들겠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박장군. 짐 가지러 가야 해.”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박장군이었다. 자존심을 구기고 제 연애를 털어놓았던 그날, 장군은 자신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잘 만났다고, 자신을 고용하라고. 아무리 잘난 김재명이라도 연애에는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으니 장군의 속내를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뻔한 일이었다. 그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군과 함께하기로 한 이후, 장군이 내건 규칙은 딱 세 가지였다.
신준영을 만날 땐 늘 자신과 함께일 것.
됐다고 할 때까지 신준영에게 진심을 표현하지 말 것.
입금은 일이 성공한 후에 할 것.
“카레 먹고 싶은데 김재명 씨는 어때요. 콜?”
“…마음대로 해.”
그 조건들에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장군과 해 온 일들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품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장군의 사과에는 무언가 있었다. 귀에 박힌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라고. 뭐가? 왜? 지금까지 장군이 계획한 대로 아무 문제 없이 해 왔다. 그렇다면 장군이 미안할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신준영?”
익숙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재명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시선을 느끼고 있을 텐데 장군은 재명을 보지도, 차를 세우지도 않았다. 신준영 씨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 아, 나 개인정보에 굉장히 민감한데. 너스레를 떠는 말과는 달리 장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와 닮은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재명이 입을 열었다.
“박장군. 차 세워.”
“안 그래도 지금 가는 중이니까 만나서 얘기합시다. 내가 지금 운전 중이라. 왜 가긴요, 짐 가지러 가죠.”
“잠깐 세우라니까.”
“목소리 들리시죠? 당연히 옆에 있고, 같이 가고 있으니까 일단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장군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명이 장군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 좀 세워. 재명의 말에도 장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장군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신준영이 사실을 알았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명과 자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불안했다.
“내가 전에 첫사랑 얘기 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런 얘기가 아닌데.”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일 끝나고 해 줄 테니까 일단은 기다려요.”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신준영의 전화 한 통에 이렇게나 흔들리는 김재명이라면, 아닌 척해도 온종일 핸드폰을 힐끔거리고,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 당신이라면 이제 내 감정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정말로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 사과도 했고, 곁에 있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명은 장군의 말보다 신준영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더 답답해 보였으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은 나의 첫 숨이라고. 당신을 사랑했다고. 눈을 마주보고, 두 손을 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허락한다면 그때까지만 시간을 붙잡아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김재명 씨.”
“…….”
“아니, 그냥. 일 끝나면 기름값까지 다 받아낼 테니까 잠수 탈 생각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변명을 하겠지.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참이나 전의 얘기일 뿐이라고. 주는 돈 다 받고, 변명거리를 만들 거야. 우리는 그냥 비즈니스 관계였다고. 나도, 사랑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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